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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디의 현실 (1편) 진상에 초연한 경지를 위하여, 멘탈 관리

by usesake 2024.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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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캐디로서 근무하며 캐디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기록한다. 아주 오랜만에 진행이 어려운 팀을 만났다. 이를 계기로 진상에 초연한 경지를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 마음가짐을 되새겨 적어보겠다.

본 내용과 상관이 없는 사진

진상에 초연한 경지를 위하여

"새벽 내린 비에 모래가 젖어 무겁습니다. 벙커샷이 많이 어려우실테니 빼고 치시는게 어떨까요?" 이 말의 뜻은 우리가 앞팀을 쫓아가지 못하고 있으니 다음 홀에서 멀리건이라도 치시려면 벙커에서 헤메는 일은 하지 말아 달라는 뜻의 완곡한 표현이다. 또한 이 말은 애초에 벙커샷을 한 번에 해내거나 홀컵 주변으로 잘 붙일 수 있는 높은 가능성을 가진 플레이어에게는 하지 않는다.

 

골프는 정말 좋은 취미이자 멘탈 강화 훈련이다. 하지만 몇몇 필드에 나온 사람들 중에는 상업적인 골프장 운영 시스템에 맞지 않는 플레이 습관을 가진 분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뒷팀에 쫓기고 앞팀을 쫓아가지 못하여 캐디님들이 벌당을 받게 되는 일을 보면 너무나 안타깝다. 또한 단지 이같은 현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기 운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조력자인 캐디와의 충분한 상호작용이 이루어지지 못해 서로에게 스트레스를 가중시킨다. 그래서 캐디 탓을 한다. 악순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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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온, 5온을 하고 와중에 그린 벙커는 꼭 한번씩 들어가 주며, 퍼팅은 기본 3번씩 하는데 당연히 느리지. 누구든 이들을 이해를 해야 된다.

기본 3온, 4온에 1~2 퍼트를 하는 앞, 뒷팀 사이에 샌드위치 속처럼 껴서 압박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뒷팀이 3인 플레이라도 된다면 따가운 뒷통수와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캐디의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뒷팀이 페어웨이 한가운데 서서 쳐다보며 기다리고 있으니 부담스럽지 않을 수가 없고 앞팀 꽁무늬는 이미 멀리 달아난지 오래이다. 그린에 올라와서 마크를 절대 하지 않고 공 앞에 뿌리내릴 듯 서서 다른 사람의 라이 놓아 주는 것을 보고만 있는 아줌마들의 모습을 뒷팀도 분명 보고 있었으리라. 나의 이런 상황을 조금만 이해해주길 헛된 기대를 하면서, 뒷팀 캐디님의 답답한 심정을 헤아려 조금이라도 바쁘게 뛰어다닌다.

 

아름다운 전경이 펼쳐진 파 3에서는 단체 사진도 빼놓지 않고 찍는다. 한 명이 멀리건까지 썼지만 개의치 않는다. 이럴 때는 뒷팀이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 다음 홀에서 앞 팀의 앞팀도 밀리고 있는 상황이기에 충분히 정성스러운 사진을 찍어드린다. 그리고 나는 그린 플레이를 마친 후 정중하게 기다려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뒷팀에 보낸다. 인사할 시간에 빨리 가라고 생각한대도 어쩔 수 없다. 골프는 예절이 수반되어야 하는 스포츠이다. 우리 손님은 예절이 없지만 나라도 챙길 수 밖에.

 

한 샷, 한 샷, 정성스럽게 치고 싶은 그녀는 열 타 중에 그래도 20%의 확률로 평소 자신의 제 거리였을 거리를 보낸다. 나는 나머지 8할에 기대어 갖고 있는 클럽으로 쳐도 올라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지만, 굳이 흐름을 끊어가며 더 짧은 클럽을 달라고 한다. 제대로 맞아도 안 올라갈 클럽을 말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진행을 위하여 미리 그녀가 주문할 만한 것들을 챙겨 다닌다. 실랑이 해 봤자 서로 기분만 나쁠 뿐이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듯 고집을 부린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제발 한 번 만이라도 제대로 올려줘.' 너무 안타까워 하는 제스처 탑재는 필수이다.

멘탈 관리

베테랑 플레이어가 캐디를 보면 신입인지 경력자인지 파악할 수 있듯, 오늘 경기에서 자신의 퍼포먼스가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과, 자신의 실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사람은 캐디가 볼 때에도 확연한 차이가 난다. 굳이 체면을 차리려고 하지 않고 받아들이면 되지만 인간이란 자기보호 본능에 충실한 두뇌를 갖고 있어서, 그게 잘 안된다.

캐디는 그것을 이해하고 진심을 담아 도움을 주는 노력을 해야 한다. 내 말이 맞고 확실한 것이어도 그런 방어적 반응을 보이는 사람에게는 직진을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조심스럽게 둘러서 권유하거나 손님이 한 번 이라도 자신의 주장대로 해내었다면 아낌없는 칭찬을 통해 그들의 멘탈을 잘 이끌어 가야만 한다. 이는 곧 내 멘탈을 지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경기가 무사히 끝나고 그들의 호감도 환심도 얻었고 신뢰도 얻었으니 잘 끝났다고 생각했으나 찜찜함은 지울 수가 없다. '캐디 평가 설문'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지쳐 잠든 낮잠에서 악몽을 꾸었다. 정성을 다 해 너의 사기를 북돋으려 애썼고 좋은 기억을 갖고 돌아갈 수 있게 보좌했지만 뒤돌아서 어떻게 이런 뒷통수를 치냐며 프론트에서 대판 싸우는 꿈을 꾸고 깨어나보니 눈가에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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